3.1 독립운동은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, 관련 공식 통계 조차 없는 실정이었는데요. <br /> <br />당시의 만세 시위의 전개 과정을 담은 세세한 기록이 100년 만에 데이터로 복원됐습니다. <br /> <br />함형건 기자가 전해드립니다. <br /> <br />[기자] <br />대한독립을 외치며, 거리로 뛰쳐나온 3.1 만세 물결은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. <br /> <br />처음엔 종교인과 학생들이 주도했던 만세 운동은 지역 주민이 대거 합류하며 그 열기를 더했습니다. <br /> <br />경기도 장안면·우정읍 일대에서는 주민 총 2천명이 참여해 새벽부터 저녁까지 장소를 7곳으로 옮겨가면서 만세시위를 이어갔습니다. <br /> <br />당황한 일제는, 닥치는 대로 지역 민가에 불을 지르는 보복을 했습니다. <br /> <br />뜨거웠던 그 만세운동의 현장은, 지금은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했습니다. <br /> <br />주민들이 모여 만세시위를 결의했던 교회는 다른 장소에 복원되었고, 만세 시위의 절정을 이뤘던 일본 경찰 주재소 자리는 지금 한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. <br /> <br />이처럼 시골 장터와 부락 등 곳곳에서 진행됐던 100년 전의 그 치열했던 만세 현장을 데이터로 다시 복원했습니다. <br /> <br />국사편찬위원회가 임시정부 문헌과 사료, 일제 판결문, 조서 등을 총망라해 작성한 자료를 기반으로 YTN 데이터저널리즘팀이 다시 시각화해 봤는데요. <br /> <br />3월 1일을 기점으로 만세 시위가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양상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. <br /> <br />날짜가 지나면서, 만세 시위지가 점점이 누적되어 표시되고 있습니다. <br /> <br />남쪽으로는 제주와 전남, 경남, 북쪽으로는 함북과 평북 지역까지 전방위로 확산됐습니다. <br /> <br />지금처럼 교통이나 통신이 발달하지도 않았던 시절이었지만, 한반도 전체를 만세물결로 빼곡히 메우는데는 한달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. <br /> <br />만세 시위 건수는 1,692 건으로 집계되었는데, 앞서 보신 경기도 화성의 경우처럼 개별 장소별 시위를 나눠서 세어보면 훨씬 더 많아질 수 있습니다. <br /> <br />시위참여인원수도 국내외에서 최대 백만 명에 달했고,사망자도 최대 9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됐습니다. <br /> <br />3월 1일부터 석달간의 만세 시위 추이를 다시 보겠습니다. <br /> <br />만세 시위는 꾸준히 증가하면서 그 양상도 격렬해졌습니다. <br /> <br />유관순 열사가 이끈 아우내 장터 시위가 있기도 했던 4월 1일에 정점을 이룬 뒤 5월을 넘어 연말까지도 간헐적으로 이어졌습니다. <br /> <br />[김정인 /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: 특정한... (중략)<br /><br />▶ 기사 원문 : https://www.ytn.co.kr/_ln/0101_201902211535269241<br />▶ 제보 안내 : http://goo.gl/gEvsAL, 모바일앱, 8585@ytn.co.kr, #2424<br /><br />▣ YTN 데일리모션 채널 구독 : http://goo.gl/oXJWJs<br /><br />[ 한국 뉴스 채널 와이티엔 / Korea News Channel YTN 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