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교육·언론으로 항일…인촌 김성수 70주기

2025-02-17 1 Dailymotion

<p></p><br /><br />[앵커]<br>교육과 언론으로 일제에 맞섰던 인촌 김성수 선생 서거 70주기가 내일입니다. <br> <br>개인보다 공동의 이익을 우선했던 인촌의 '공선사후' 정신은 지금까지도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. <br> <br>김재혁 기자입니다.<br><br>[기자]<br>[대한뉴스 (1955년 2월 24일)] <br>"그 일생을 조국의 정치 경제 교육을 위해 바친 故 인촌 김성수 선생의 국민장이 국민 각계각층이 애도하는 가운데 엄숙히 거행되었습니다." <br> <br>항일과 독립, 6·25 전쟁 후 부통령으로 대한민국 기틀 마련에 일생을 바친 인촌 김성수 선생. <br> <br>일본 제국에 나라를 빼앗기자 가장 먼저 한 일은 중앙학교와 보성전문 인수 등 교육이었습니다. <br> <br>올해 105세로 당시 중앙고 교사로 있었던 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 궂은일도 마다치 않고 인재를 모으고 가르쳤다고 인촌을 기억합니다. <br> <br>[김형석 / 연세대 명예교수] <br>"인촌 선생을 뵈고 나니까 큰 나무 같아요. 그 나무 밑에 이제 많은 사람이 머물 수 있고 나도 머물 수 있는 큰 나무 같은 생각이 드니까." <br> <br>인촌은 중앙고 숙직실에서 송진우, 현상윤 선생과 함께 생활하며 3.1운동을 준비하고 이끌었습니다. <br> <br>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 편지를 주고받으며 독립 의지를 다지기도 했습니다. <br> <br>민족의 혼을 깨우기 위해 동아일보를 창간했고 경성방직을 운영하며 독립운동가들도 꾸준히 지원했습니다. <br> <br>[이종찬 / 광복회장] <br>"(이규봉 선생) 귀국시켰는데 다 팔고 왔으니까 지금 거처도 없다 그러니까 동아일보 교정부에 들어가서 있었어요. 안창호 선생이 사고무친 아무도 없으니까 (인촌 선생이) 뒷바라지를 해주신 것. 이런 것이 전부 우리가 알고 있는 거거든요." <br> <br>민족 독립에 필요한 인재와 언론, 산업을 동시에 키워낸 인촌은 개인의 이익보다 공익이 우선이란 '공선사후'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. <br> <br>인촌의 70주기 추모식은 내일 남양주 인촌 묘소에서 진행됩니다. <br> <br>채널A 뉴스 김재혁입니다. <br> <br>영상취재 : 정기섭 <br>영상편집 : 석동은<br /><br /><br />김재혁 기자 winkj@ichannela.com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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