1919년 3·1 운동이 일어난 지도 벌써 105년이 지났습니다. <br /> <br />그때의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는데요, <br /> <br />정작 독립운동가의 후손 중에는 보상금도 받지 못하고 생계에 쪼들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. <br /> <br />윤태인 기자가 후손을 만나봤습니다. <br /> <br />[기자] <br />1919년 일제 치하 때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갔던 3·1 만세 운동. <br /> <br />그 불길은 당시 경기도 수원군 송산면에 살았던 오광득 씨 마음도 뒤흔들었습니다. <br /> <br />동지들과 만세운동에 나선 오광득 씨는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가 6년 동안 옥살이하는 고초를 겪었습니다. <br /> <br />100여 년이 지난 지금, 삼일절을 맞아 손자 오건석 씨가 취재진과 함께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았습니다. <br /> <br />할아버지가 갇혔던 옥사를 둘러보며 오 씨는 참담함을 감추지 못합니다. <br /> <br />[오건석 / 故 오광득 독립운동가 손자 :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요.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서 내가 옥살이를 했다…. 할아버지는 참 옳게 살고 곧은 분이시다….] <br /> <br />할아버지의 공적을 기리고 나라에 인정받기 위해 손자가 몇 년 동안 애를 쓴 덕분에 오광득 씨는 20년 전 건국훈장 4등급에 빛나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습니다. <br /> <br />[오건석 / 故 오광득 독립운동가 손자 : 엄청 좋았죠. 우리 할아버지가 가신 지는 오래되셨어도 이렇게 대통령이 직접 이걸 줬다. 굉장히 기뻤어요.] <br /> <br />하지만 할아버지의 옥살이로 인해 유일한 아들이었던 아버지가 12살 때부터 생업에 뛰어드는 등 독립운동가 자손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. <br /> <br />할아버지의 공적을 인정받으려 뛰어다녔던 손자도 윤택하지 못한 삶을 사는 건 마찬가지입니다. <br /> <br />유공자 후손으로 인정돼 받는 지원금은 생활지원금 40만 원 남짓에 불과합니다. <br /> <br />[오건석 / 故 오광득 독립운동가 손자 : 번창하지 않고 사업에 실패하고 한 사람이 더 많더라고요. 정부가 더 잘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면 좀 제대로 된 보훈급여가 나왔으면 좋겠다….] <br /> <br />금액이 훨씬 큰 정부 보상금도 있지만, 선순위 보훈대상자 가운데 단 한 사람에게만 지급됩니다. <br /> <br />그러다 보니 후손들 사이에 다툼으로 번지는 일도 부지기수입니다. <br /> <br />지원 기준도 까다롭고 규모도 넉넉하지 않은 현실이 아쉽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. <br /> <br />[이상욱 / 독립유공자유족회 이사 : 옛날에 이 독립운동한 분들을 모시고 살았거나 그와 아주 가까운 친척 이분들은 선순위에 들어... (중략)<br /><br />YTN 윤태인 (ytaein@ytn.co.kr)<br /><br />▶ 기사 원문 : https://www.ytn.co.kr/_ln/0103_202403010521223946<br />▶ 제보 안내 : http://goo.gl/gEvsAL, 모바일앱, social@ytn.co.kr, #2424<br /><br />▣ YTN 데일리모션 채널 구독 : http://goo.gl/oXJWJs<br /><br />[ 한국 뉴스 채널 와이티엔 / Korea News Channel YTN ]